세계유산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국제 협력 프로젝트
전 세계는 지금 고대 문명의 흔적을 발굴하고, 이를 통해 인류의 뿌리를 되새기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이번에는 대한민국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튀르키예 앙카라대학교와 함께 고대 도시 퀼테페-카네시(Kültepe-Kanesh) 유적의 공동 발굴에 착수한다는 소식은, 단순히 한 고고학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국제적 문화유산 연구 위상을 한 단계 높이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3000년부터 번성한 고대 도시, 퀼테페-카네시
튀르키예 중부 카이세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퀼테페-카네시는 고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곳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로마 제국 시대까지 번성했으며, 특히 히타이트(Hittite)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될 정도로 역사·고고학적 가치가 크며, 현재까지 전체 면적 중 약 3%만 발굴되었을 뿐인데도 인류 역사 이해에 중요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발굴에서 어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지 기대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리아 상인의 흔적, 2만 점이 넘는 설형문자 점토판
퀼테페-카네시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카룸(Karum)’이라 불리는 하부 도시 덕분입니다. 이곳은 상업 중심지이자 외국 상인들의 거주지였는데, 고대 아시리아 상인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흔적이 잘 남아 있습니다.
발굴을 통해 무려 2만 3,500점에 달하는 설형문자 점토판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고대 사회와 상업의 실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사료로 평가됩니다. 이 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퀼테페의 고대 아시리아 상인 기록물’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국제 무역망, 상업 활동, 사회 구조까지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타이트 문명의 발상지
퀼테페-카네시는 단순한 상업 도시가 아니라 히타이트 문명의 발상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7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오늘날 튀르키예 중부를 중심으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제국입니다.
유적의 상부 도시에는 왕궁과 신전이 있었고, 하부 도시는 상업과 거주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 발굴이 집중될 와르샤마 궁전 일대는 궁전 핵심부와 연결된 요충지로, 보존 상태가 양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이 구역의 조사 결과는 히타이트 문명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한국 연구진의 참여, 국제 협력의 상징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은 지난 5월 퀼테페-카네시 유적에 대해 지하물리탐사와 3차원 항공측량을 통해 주요 유구의 위치를 사전 확인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올해 공동 발굴에서는 실제 시굴 작업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나오는 주요 유물은 정밀 3D 스캐닝을 통해 디지털 기록으로 남기며, 첨단 기술을 활용한 연구 성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지난해 대한민국 국가유산청과 튀르키예 문화관광부가 체결한 문화유산 교류협력 협약의 성과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하버드대, 예일대, 이탈리아 밀라노대, 일본 오카야마대 등 세계 유수의 연구기관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어, 한국 연구진이 글로벌 학술 네트워크 중심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국제 고고학계에 던지는 의미
이번 한국 연구진의 퀼테페-카네시 발굴 참여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 세계사 연구 기여 : 히타이트와 아시리아 문명은 인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 문명입니다. 한국 연구진이 이 연구에 직접 기여한다는 것은 세계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함께 써내려 간다는 의미입니다.
- 문화강국으로서의 위상 강화 : 한국은 그동안 자국 내 문화유산 보존과 연구에 집중해 왔지만, 이제는 국제적 차원에서 문화유산 연구를 선도하는 위치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 첨단 기술의 접목 : 3D 스캐닝, 지하물리탐사, 항공측량 등 최신 과학 기술을 고고학 발굴에 접목함으로써, 기존보다 더 정밀하고 체계적인 연구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는 한국이 가진 기술력이 국제 고고학 연구에 실질적 기여를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계사 속에 새겨질 한국의 이름
퀼테페-카네시 유적은 아직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고대 도시의 형성과 발전, 제국의 흥망, 상업과 교류의 흔적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이번 공동 발굴을 통해 밝혀질 새로운 사실들은 인류사의 퍼즐을 맞추는 데 소중한 조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대한민국 연구진이 함께한다는 사실은, 한국이 더 이상 동아시아의 한 연구 주체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고고학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앞으로 이어질 발굴과 연구가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유산 보존에 기여하는 값진 성과로 이어지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