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에서 피해자와 합의가 되지 않아도 피고인이 법원에 일정 금액을 맡기는 ‘공탁’ 제도는 원래 피해 회복을 돕기 위한 장치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 제도가 감형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대법원이 직접 칼을 빼 들었습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8월 11일 전체회의를 열고 ‘피해 회복’ 관련 양형인자에서 ‘공탁 포함’ 문구를 삭제하는 등 양형기준 수정안을 심의했다고 12일 밝혔습니다. 이번 조치는 “공탁만 하면 당연히 감경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겠다는 취지입니다.
■ 공탁, 원래 취지와 달라진 현실
공탁은 형사사건 피고인이 피해자와 직접 합의를 하지 못했을 경우, 법원에 일정 금액을 맡겨 두는 제도입니다. 피해자는 이 공탁금을 수령해 손해를 일부라도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피해자의 동의’가 없어도 공탁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 틈을 이용해 일부 피고인은 재판 막바지에 갑자기 거액을 공탁하는, 이른바 **‘기습 공탁’**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피해자가 이를 받지 않더라도, 법원에서 감형 사유로 고려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보상’을 강제로 제시받는 셈이고, 가해자는 진정한 반성과 상관없이 형량을 줄이는 효과를 누리는 셈입니다.
■ ‘공탁 포함’ 문구 삭제… 엄격한 심사로 전환
양형위는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전체 양형기준의 ‘피해 회복’ 항목에서 ‘공탁 포함’이라는 문구를 전면 삭제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실질적 피해 회복’의 정의 자체를 손봤습니다. 앞으로는 단순히 공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는 감경이 어렵습니다. 대신, 다음과 같은 요소를 종합적으로 조사·판단해야 합니다.
- 피해자 또는 법정대리인의 의견
-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 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의 의견
- 피고인이 법적으로 공탁금을 회수할 수 있는지 여부
- 피고인이 실제로 회수 의사가 있는지 여부
- 피해 법익의 성질 및 피해 규모·정도
이 기준을 충족한 경우에만 ‘실질적 피해 회복’으로 인정해 감형 요소로 고려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양형위 관계자는 “이번 개정으로 인해 공탁이 단순히 양형 인자로 오인되는 것을 막고, 진정한 피해 회복 중심으로 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증권·금융범죄 양형기준도 12년 만에 개정
양형위는 이번 회의에서 증권·금융범죄 양형기준 개정도 예고했습니다. 해당 기준은 지난 2012년 제정된 이후 한 번도 손질되지 않았는데, 최근 금융사기 수법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현실을 반영할 필요성이 커졌습니다.
개정안에는 다음과 같은 범죄 유형이 새롭게 포함됩니다.
- 허위 재무제표 작성·공시
- 감사보고서 허위 기재
- 회계정보 위·변조
- 감사조서 위·변조 등
이는 단순 주가조작이나 내부자 거래뿐 아니라, 기업 회계와 관련된 허위 공시·조작 행위 전반을 양형기준에 포함시켜 엄정 대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양형위는 앞으로 권고 형량 범위와 양형인자를 구체적으로 설정한 뒤, 내년 3월 최종 의결을 거쳐 새 기준을 시행할 계획입니다.
■ 이번 개정이 의미하는 것
이번 양형기준 개정 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큽니다.
첫째, 피해자 중심의 형사정의 구현입니다. 그동안 공탁은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형량 할인 쿠폰’처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피해자의 동의와 사건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진정한 회복 의사가 있는지 엄격히 따질 수 있게 됩니다.
둘째, 경제·금융 범죄 대응 강화입니다. 최근 회계 부정, 허위 공시, 기업 내부 문서 위·변조 등의 사건이 대형 피해로 이어지고 있지만, 양형기준이 오래돼 현실과 괴리가 컸습니다. 개정을 통해 처벌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억지력(Deterrence)을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 앞으로의 전망
공탁 관련 기준이 강화되면, 피고인 측에서는 피해자와의 직접 합의 또는 진정성 있는 배상 노력이 없으면 감형을 기대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는 변호 전략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 금융·증권 범죄 기준 강화는 기업과 회계법인의 법률 리스크 관리에도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허위 공시나 회계조작에 대한 처벌이 무거워질 경우, 내부 통제와 준법경영 강화 요구가 커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이번 움직임은 ‘형량 감경을 위한 형식적 절차’에서 ‘실질적 피해 회복’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형사사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범죄 억제와 피해자 보호입니다. 공탁 제도가 본래 취지대로 자리 잡고, 금융·증권 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이 시대에 맞게 강화된다면, 형사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성이 한층 높아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