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의 거장 김혜순 시인이 독일 베를린에서 또 하나의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지난 7월 17일(현지시간), **독일 세계문화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 HKW)**이 수여하는 **국제문학상(Internationaler Literaturpreis)**을 김혜순 시인이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했습니다. 수상작은 그녀의 대표 시집 《죽음의 자서전(Autobiografie des Todes)》의 독일어 번역본으로, 이는 한국 문학의 국제적 위상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아시아 최초 수상, 심사위원 만장일치
HKW는 해마다 전 세계의 뛰어난 문학 작품 중 독일어로 번역된 책을 대상으로 국제문학상을 수여합니다. 2024년 국제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른 6명 중, 김혜순 시인은 심사위원단 만장일치로 수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HKW 심사위원단은 김혜순의 시에 대해 “그 경이로움 속에서 의미는 종종 불가사의함 속에 명확히 드러난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녀의 시가 단지 언어의 아름다움을 넘어서, 독자에게 깊이 있는 인식과 감각적 체험을 제공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상은 작가와 번역자에게 공동으로 수여되는 형식을 취합니다. 《죽음의 자서전》 독일어판은 대산문화재단의 출판 지원을 받아 출간되었으며, 번역은 시인 겸 번역가 **박술(Park Suhl)**과 독일 시인 **울리아나 볼프(Uljana Wolf)**가 맡았습니다. 김혜순과 함께 이 두 사람 역시 공동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죽음의 자서전》: 개인과 사회의 죽음을 마주한 시
《죽음의 자서전》은 김혜순 시인이 2015년 지하철역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경험을 계기로 쓰기 시작한 시집입니다. 이후 메르스 사태, 세월호 참사 등 한국 사회를 깊이 울린 사건들이 겹치며, 죽음이라는 주제를 개인적 체험을 넘어 사회적, 집단적 비극의 층위로 확장한 작품입니다. 총 49편의 시가 실린 이 시집은, 각각의 시가 죽음의 순간과 감각을 담아낸 한 편의 자서전처럼 읽힙니다.
김혜순은 이 시집을 통해 죽음과 삶, 여성과 사회, 고통과 기억에 대한 집요한 사유를 시의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그녀의 시는 전통적인 시 형식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실험적인 문체를 사용하며, 몸과 언어의 경계를 허물고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침투합니다. 독일 번역본 역시 이러한 고유한 감성과 구조를 섬세하게 전달해 유럽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세계 문학계가 주목하는 김혜순의 발자취
이번 국제문학상 수상은 김혜순 시인이 국제 문단에서 다시 한번 압도적인 존재감을 확인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 경력을 쌓아왔습니다.
- 2019년, 《죽음의 자서전》 영어판으로 **캐나다 그리핀시문학상(Griffin Poetry Prize)**을 수상하며 한국인 최초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얻었습니다.
- 2021년, **스웨덴 시카다상(Cikada Prize)**을 수상하며 유럽 문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 2024년, 시집 《날개 환상통(The Throat of the Wind)》의 영어판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National Book Critics Circle Award)**을 수상해 미국 문학계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한국이라는 국경을 넘어, 시라는 보편적 언어로 세계 문학을 새롭게 쓰고 있는 작가입니다.
수상 소감: “번역자와 심사위원들께 깊은 감사를”
김혜순 시인은 현재 한국에 머무르고 있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직접 참석하지 못했지만, 화상 연결을 통해 수상 소감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번역자와 심사위원들,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한국 시문학의 세계 진출을 가능케 한 협력자들에 대한 겸손한 경의를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수상 소감에서도 느껴지듯, 김혜순 시인은 언제나 시를 통한 연대와 경계 없는 공감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 소수자, 고통받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독자에게 자신만의 해석과 감정을 이끌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 시문학의 세계화, 그 중심에 선 김혜순
김혜순 시인의 이번 수상은 단순히 한 시인의 영예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한국 시문학이 언어와 문화의 벽을 넘어 세계 문단에서 보편적 가치를 발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입니다. 특히 HKW 국제문학상은 세계 각국의 문화가 독일이라는 유럽 중심지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재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무대입니다.
김혜순의 시가 전 세계에서 공감을 얻는다는 것은, 그녀의 작품이 언어의 경계를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앞으로 더 많은 한국 시인들이 국제 문단에 진출할 수 있는 문을 여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김혜순 시인의 이번 수상은 한국 문학이 '지역의 언어'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적 언어로 진화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명입니다. 《죽음의 자서전》은 죽음과 고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의 언어로 풀어냈습니다. 이제 한국의 시가 세계 문학의 중심에서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그 한복판에는 바로 김혜순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