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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를 흔드는 ‘좌초 자산’의 시대 – 트럼프 라운드와 글로벌 자본의 대이동

by obusylife 202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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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의 무게 중심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좌초 자산(Stranded Assets)’**입니다. 이는 본래 기후 변화 대응 과정에서 사용되던 개념으로, 석유·가스·석탄 등 화석연료 기반 자산이 정책과 기술 변화로 인해 더 이상 경제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는 현상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좌초 자산의 범위는 기후 이슈를 넘어 **‘지정학적 좌초 자산(Geopolitical Stranded Assets)’**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미국이 내세운 **‘트럼프 라운드’**가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종식과 다자주의 무역 질서의 종료 선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글로벌 경제를 지탱해 온 다자간 무역 규칙은 효율성과 자유무역을 핵심 가치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국익과 안보 중심’의 새로운 무역 체제를 선언하면서 전 세계는 본격적인 패러다임 전환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다자주의의 종말, ‘트럼프 라운드’의 등장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제이미슨 그리어는 최근 기고문을 통해 WTO 체제를 끝내고 ‘트럼프 라운드’를 개막한다고 밝혔습니다. 단순한 무역 정책 변화라기보다, 글로벌 경제 질서의 근본적 재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제 무역 정책은 ‘효율성’보다 ‘안보’와 ‘자국 우선’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이러한 변화는 글로벌 공급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지난 수십 년간 세계 자본은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공급망에 집중 투자했습니다. 그러나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미국이 고율 관세를 무기로 삼으면서 중국에 집중된 설비와 공장, 물류망이 하루아침에 경쟁력을 잃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좌초 자산이 대거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정학적 좌초 자산의 특징

과거의 좌초 자산은 주로 **운영 가치(미래 현금 흐름)**의 감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예컨대 석탄발전소가 정책 규제로 더 이상 수익을 낼 수 없게 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지정학적 좌초 자산은 한층 더 복합적으로 작동합니다. 운영 가치는 물론이고, 자산을 처분해 회수할 수 있는 청산가치까지 동시에 붕괴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 중국 내 공장은 수익성을 잃게 됩니다. 동시에 중국의 불투명한 규제와 경기 침체는 해당 공장을 매각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듭니다. 이처럼 투자 자산이 ‘영구적으로 갇히는 현상’이 지정학적 좌초 자산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IMF의 경고: “세계 GDP 최대 7% 감소”

국제통화기금(IMF)은 지정학적 파편화가 장기화될 경우 세계 경제가 받을 충격을 분석했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는 세계 경제가 미국 블록과 중국 블록으로 완전히 양분되고, 기술 탈동조화(Decoupling)까지 겹칠 경우 세계 GDP가 장기적으로 최대 7% 감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지난해 세계 GDP가 약 109조 달러였음을 감안하면, 무려 7.6조 달러 규모의 손실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모든 기업의 미래 기대 수익이 줄어든다는 뜻이며, 자산 가치와 금융시장 전반에도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쌓이는 좌초 자산

이미 현실은 수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은 외국인 직접투자(FDI)가 급감하며, 글로벌 기업의 탈 중국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월마트는 한때 중국에서 400여 개 점포를 운영했지만 2022년까지 130개 이상을 폐쇄했습니다. 애플, 델, HP 등 IT 기업도 생산 기지를 인도, 베트남, 멕시코 등으로 다변화했습니다.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해외 기업들이 대거 철수했습니다. BP는 러시아 로스네프트 지분 포기 과정에서 250억 달러 손실을 입었고, 셸도 40억~50억 달러 규모의 감손 처리를 했습니다. 2023년 3월 기준, 러시아에서 철수한 외국 기업들의 누적 손실만 1070억 달러가 넘습니다.

한국 기업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미 중국 스마트폰·PC·가전 공장을 폐쇄했고, 현대차도 중국 내 5개 공장 중 대부분을 매각하거나 철수했습니다.


자본의 새로운 이동: ‘포스트 차이나’

중국에서 회수된 자본은 새로운 투자처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수혜국은 베트남입니다. 2024년 초 베트남이 유치한 외국인직접투자는 전년 대비 39.9% 증가했으며, 애플 협력업체만 30곳 이상이 베트남에 자리 잡았습니다.

인도는 아이폰 주요 생산 기지로 부상하며, 세계 제조업 판도 속에서 ‘포스트 차이나’의 핵심 후보가 되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미국과의 지리적 근접성을 무기로 니어쇼어링의 대표적 수혜국으로 떠올랐습니다.

또한 동유럽,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도 공급망 다변화 투자처로 주목받고 있으며, 글로벌 자본의 이동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 속의 새로운 기회

‘트럼프 라운드’가 촉발한 새로운 세계 무역 질서는 이전보다 더 비용이 크고, 더 불안정하며,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를 열고 있습니다. 좌초 자산의 증가는 투자자와 기업 모두에게 위기이자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지정학적 리스크는 기존 자산의 가치를 훼손하지만,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투자처를 발굴하는 촉매제 역할도 합니다. 베트남, 인도, 멕시코 등 신흥시장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글로벌 경제는 ‘효율성’이 아닌 ‘안보와 국익’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입니다. 자본은 더 빠르게, 더 유연하게 이동하며 새로운 패권 경쟁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좌초 자산의 시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읽는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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