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전 세계적으로 암 환자의 사망 위험이 크게 증가했다는 보고가 이어졌습니다. 최근 미국 콜로라도대 의과대학 제임스 디그레고리 교수 연구팀이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한 논문은 이러한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단순히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몸속에 잠복해 있던 ‘휴면 암세포’를 깨워 빠르게 증식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휴면 암세포란 무엇인가?
암 치료를 받다 보면 일정 기간 동안 증상과 통증이 사라지는 시기를 맞게 됩니다. 이를 **관해기(remission)**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는 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 환자와 가족에게 큰 안도감을 줍니다.
하지만 관해기에도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 골수, 폐, 간 등 특정 조직에 **‘휴면 암세포(dormant cancer cell)’**가 숨어 있다가
- 수개월, 수년 후 재발 또는 전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방암 생존자의 약 25%**는 휴면 상태의 암세포 때문에 예기치 못한 재발을 경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립선암, 피부암 등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보고됩니다.
그렇다면 이 휴면 암세포는 언제, 왜 깨어나는 것일까요?
과학자들은 그 원인으로 흡연, 노화, 만성 염증 등 체내 환경의 변화를 지목해 왔습니다.
코로나19와 독감, 휴면 암세포를 깨우다
이번 연구팀은 호흡기 바이러스 감염이 암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했습니다. 연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됐습니다.
- 유전자를 변형한 실험용 쥐에게 유방암 세포를 심어 휴면 상태를 만들고
- 쥐의 폐를 포함한 여러 조직에 잠복 암세포를 이식한 뒤
- 코로나19와 독감 바이러스에 각각 감염시켰습니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 감염 후 2주 만에 휴면 암세포가 급속도로 증식하며
- 다른 장기로 **전이(metastasis)**가 일어났습니다.
연구팀은 이를 **“불씨를 다시 피우는 바람”**에 비유했습니다.
휴면 암세포는 타다 남은 재와 같고, 바이러스 감염은 재를 다시 불붙게 하는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면역 반응과 IL-6의 역할
흥미로운 점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암세포를 직접 자극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 체내 면역 반응이 촉매 역할을 한다고 연구팀은 밝혔습니다.
- 바이러스 감염 시, 우리 몸은 염증 반응을 일으켜 싸웁니다.
- 이때 분비되는 인터루킨-6(IL-6) 같은 **신호물질(사이토카인)**이
- 휴면 암세포의 성장 스위치를 켜고
- 빠른 증식을 유도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IL-6가 결핍된 생쥐에서는 암세포 증식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습니다.
이는 코로나19·독감 등 바이러스 감염 후 발생하는 사이토카인 폭풍과 암 재발 간의 연관성을 시사합니다.
암 생존자를 위한 예방적 시사점
연구 책임자인 디그레고리 교수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습니다.
“암 생존자는 호흡기 감염을 피하기 위해
각별한 예방 조치를 취하고,
코로나19 및 독감 예방 접종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즉, 단순 감염이라 하더라도 휴면 암세포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 백신 접종
- 손 위생 및 마스크 착용
- 호흡기 질환 유행 시 외출·접촉 최소화
등의 생활 관리가 재발 예방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연구팀은 향후
- 폐 이외의 다른 조직에서의 암세포 활성화
- 다양한 암 유형과 일반적 병원균과의 연관성
에 대한 연구를 확대할 계획입니다.
코로나19는 단순 호흡기 질환이 아니다
이번 연구는 코로나19의 파급력이 단순히 폐렴과 호흡기 질환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암세포와 같은 잠복 질환 요소까지 활성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팬데믹 기간 암 사망률이 증가한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암 생존자뿐 아니라 만성질환자와 면역 저하자 역시 호흡기 감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감기 한 번쯤은 괜찮다’는 생각이 잠복 질환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음을 이번 연구가 시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과학계는 코로나19와 암, 면역 체계의 관계를 면밀히 탐구하며
더 나은 치료와 예방 전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