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유혈사태와 신자유주의: 미국은 지금 ‘내전’의 초입에 있는가
2025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유혈사태는 단순한 이민자 단속을 넘어선 어떤 상징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단속의 주체는 이민세관단속국(ICE)이었고, 그 방식은 대단히 폭력적이며 법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연방보안관보를 불법 구금한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밝혀졌고, 단속 과정은 거의 전시작전을 방불케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군대 투입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며 "내전을 원하지 않지만 방치하면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정말 그럴까?
이 사태를 깊이 들여다보면, 단순한 법 집행이나 정치적 갈등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내전’이라는 개념과 직결된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앙 라발 등이 속한 '신자유주의와 대안 연구그룹'은 저서 『내전, 대중 혐오, 법치』에서 미국과 칠레를 신자유주의적 내전의 전형적 사례로 분석했다. 칠레의 폭동과 계엄령,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와 반인종주의자 간 충돌은 단지 정치적 혼란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과 전쟁을 벌이는 체제', 즉 신자유주의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지 경제 정책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 체제이며, 사실상 ‘엘리트 독재’를 정당화하는 철학이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루이 루지에 등 고전적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일관되게 주장했다. 대중의 권력을 제한하고, 시장과 통치를 엘리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노예제마저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미제스는 "노예제를 유지한 주인들이 대체로 부드럽고 인간적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런 발언은 단순한 역사 왜곡을 넘어서, '효율성'을 앞세운 비인간성의 극치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 하이에크는 "소득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려 하면 오히려 자유를 해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안전망은 시장의 자유를 해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란, 시장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 즉 이미 가진 자의 자유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 인하를 주장하거나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같은 맥락이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는 보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진보진영 역시 ‘제3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 영국의 노동당, 미국의 민주당, 그리고 한국의 진보정부조차 자유무역·민영화·탈규제를 추진했다. 이념을 넘는 시스템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이미 정치 영역을 초월해 ‘일상적 권력’이 되었다.
이번 캘리포니아 유혈사태는 그런 일상적 권력이 드러난 장면 중 하나다. 단속은 법보다 시장과 정치의 필요에 의해 결정됐고, 폭력은 정당화됐다. 트럼프가 "내가 톰이라면 주지사도 체포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그 순간, 민주주의는 조롱당했다. 신자유주의는 대중 혐오와 법치 파괴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결국,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신자유주의가 제안하는 ‘엘리트의 질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진짜 자유와 평등을 위한 대안을 모색할 것인가? 내전은 지금 당장 총칼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신뢰의 붕괴, 국가와 국민의 괴리, 그리고 보이지 않는 폭력의 일상화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이번 캘리포니아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자유를 말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