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성추행 피해자에게 막대한 명예훼손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항소심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미국 뉴욕 연방고등법원은 9월 8일(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이 패션 칼럼니스트 E. 진 캐럴에게 8,330만 달러(약 1,155억 원)의 명예훼손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법원은 “배심원단의 판결은 합리적이었다”며 트럼프 측의 항소 주장을 일축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개인 간의 민사 소송을 넘어, 미국 사회에서 대통령의 자질과 공직자의 도덕성 문제를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개인의 법적·도덕적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음을 보여준 이번 판결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도자의 자격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트럼프와 캐럴 사건의 핵심
E. 진 캐럴은 1996년 뉴욕의 한 백화점 탈의실에서 트럼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2019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2023년 5월 열린 1심에서 배심원단은 “성폭행 증거는 불충분하다”라고 판단했으나, 트럼프가 캐럴을 성추행한 사실은 인정했다. 이에 법원은 500만 달러의 배상을 명령했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트럼프는 재판 이후에도 “캐럴은 거짓말쟁이이며, 내 타입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이어갔다. 이에 캐럴은 추가적인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1심 재판부는 2024년 1월 트럼프에게 무려 8,330만 달러의 배상을 명령했다. 이번 항소심은 그 결정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트럼프 측은 대통령의 면책 특권을 주장하며 배상액을 줄이려 했지만, 법원은 그가 이미 재판 초기 단계에서 이를 제기하지 않았기에 권리를 포기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대통령이더라도 사법 절차를 회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판례로 기록될 전망이다.
대통령의 자질과 도덕성
이번 판결은 단순히 트럼프 개인의 법적 책임을 넘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요구되는 ‘도덕적 자질’ 문제를 제기한다. 미국 대통령은 세계 최강국을 이끄는 정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상징적 존재다. 따라서 대통령의 언행은 단순한 개인의 자유를 넘어 사회적 책임을 수반한다.
트럼프는 재임 시절부터 수많은 성추문과 여성 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빚어왔다. “여성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과거의 발언은 이미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바 있으며, 이번 사건 역시 그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대통령이 법정에서 반복적으로 “그녀는 내 타입이 아니다”라는 식의 공격적 발언을 이어갔다는 사실은, 공적 인물로서의 품위와 책임감을 무겁게 의심하게 만든다.
미국 민주주의와 대통령 책임
법원이 트럼프의 면책 특권 주장을 기각한 점은 미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을 상기시킨다. 미국의 헌법은 대통령에게 일정 부분 면책 특권을 부여하지만, 이는 공적 직무 수행과 관련된 사안에서만 적용된다. 개인적 행위와 사적 발언에 대해서까지 대통령이 보호받을 수는 없다.
즉,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사법적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방패가 될 수 없으며,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근본 원칙이 다시금 강조된 것이다. 이번 판결은 “대통령이라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했다.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
정치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국민의 신뢰다. 대통령의 언행이 국민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할 때, 정책적 성과와 무관하게 정치적 정당성이 흔들린다.
트럼프는 지지층 결집에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다. 여성 혐오적 발언, 언론에 대한 공격, 법적 책임 회피 시도는 그가 대통령으로서 요구되는 ‘도덕적 리더십’을 결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번 판결은 단지 금전적 배상의 의미를 넘어, 대통령 자질에 대한 사회적 심판으로 읽힌다.
대법원까지 이어질 가능성
트럼프 측 변호인은 “대통령 면책 특권은 포기될 수 없다”며 대법원에 상고할 뜻을 밝혔다. 실제로 사건이 대법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다. 그러나 이미 연방고등법원에서 만장일치로 기각된 만큼, 대법원이 이를 뒤집을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많다.
법학자 칼 토비아스 교수는 “이번 판결은 상당한 징벌적 손해배상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대통령에게도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평가했다.
대통령 자질의 본질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항소심 패소는 단순한 민사 소송 사건이 아니다. 이는 미국 민주주의가 대통령의 자질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정치적 수완이나 경제적 성과만이 아니다. 법과 도덕을 지키며 사회적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리더십이야말로 대통령 자질의 핵심이다.
트럼프가 보여준 태도는 그와 같은 자질을 결여하고 있음을 드러냈고, 이번 판결은 미국 사회가 그에 대해 내린 단호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미국 국민들은 트럼프와 같은 지도자가 다시금 백악관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